[2008.05.04 17:49] 국민일보

주부 박모(57·서울 상봉동)씨는 하루에도 몇번씩 '깜빡깜빡'하는 일을 자주 겪는다. 가스레인지 불을 켜놓고 다른 일을 하다가 냄비를 태우기 다반사고, 은행까지 가서 핸드백을 이리저리 뒤지다 통장을 집에 놓고 온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가족들로부터 '닭 엄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 박씨는 얼마전 '알츠하이머형' 치매 진단을 받고 서울의 한 노인전문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 자녀들은 "몇년전부터 엄마가 약속을 까맣게 잊는 등 건망증이 심해졌지만, 설마 이 나이에 치매일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흔히 '노망'으로 일컬어지는 알츠하이머병을 비롯한 치매는 대개 65세 이후 노인들에게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65세 이전에 발병하는 경우를 '초로기 치매' 즉, 조기 치매라고 부른다. 최근 이런 조기 치매 환자가 늘고 있다.

건강보험공단이 2006년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의하면 특히 50세 미만의 청·장년 치매 환자가 매년 1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분당서울대병원 뇌신경센터 김상윤 교수는 "30대 초반에 알츠하이머병이 발병한 경우도 보고돼 있다"면서 "65세 이전에 주로 발병하는 치매 유형은 대부분 알츠하이머병이지만 전두측두엽 치매, 혈관성 치매, 뇌외상성 치매 등도 있다"고 설명했다.

알츠하이머병은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뇌에 독성 단백질(베타 아밀로이드)이 쌓여 뇌세포가 파괴되면서 생긴다. 유전성이 강해 젊은 나이에도 발병할 확률이 높다. 주요 증상은 기억, 판단, 언어 능력의 감퇴. 이름·날짜·장소 같은 것들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심하면 화장실을 가거나 요리를 하거나 신발을 신는 등의 일상 생활조차 잊게 된다.

특히 술과 담배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알츠하이머병이 조기에 시작된다는 해외 연구결과가 최근 나왔다. 미국 마운트시나이 의대 연구팀이 알츠하이머병을 앓거나 의심되는 60세 이상 983명을 조사한 결과 17% 가량이 하루 두잔 이상의 술을 마시는 중증 음주자였고, 20% 가량은 하루 한갑 이상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연구팀은 술을 과도하게 마시는 사람은 4.8년, 담배를 지나치게 피는 사람은 2.3년 일찍 발병했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또 여기에 유전자 변이까지 함께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알츠하이머병이 무려 8.5년이나 빨리 찾아온다고 경고했다. 술과 담배를 끊는 것이 치매 발병을 늦출 수 있다는 것이다.

전두측두엽 치매는 기억력 장애보다는 성격 이상을 먼저 보이기 때문에 초기에 감별이 쉽지 않다. 성격 이상을 보이는 이유는 뇌 부위중 전두측두엽이 생각과 판단, 언어 기능, 청지각 처리, 장기 기억과 정서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립북부노인병원 정신과 이유라 과장은 "여성의 경우 조기 폐경으로 인한 에스트로겐의 저하가 인지 기능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아울러 당뇨병이 있거나 콜레스테롤이 높은 경우, 뇌에 외상 등을 입었을 때에도 조기에 치매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한창 일할 나이에 치매에 걸릴 경우 본인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크나큰 고통을 준다는 점. 50대에 치매에 걸릴 경우 질병 고통은 차치하고 경제 활동을 하지 못함으로써 여러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초로기 치매 환자를 위한 보호 시설이나 사회 제도가 전무한 것도 시급히 해결돼야 할 과제.

김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 치매 관련 시설은 모두 65세 이상 노인성 치매 환자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대책을 촉구했다. 이어 "초로기 치매의 경우 빨리 진단받고 적절히 치료하면 증상의 악화와 진행을 막을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