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병동을 운영하다 보면 절로 노인들의 병리적인 삶에 동화돼 간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침 출근 무렵 차 열쇠를 잊고 주차장으로 서둘러 내려갔던 일이나, 어느 저녁 집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다 잠시 ‘섬망’ 상태에 빠졌던 일. 어떤 책을 읽었는데 채 일주일도 안 지났건만 무얼 읽었는지, 그 소식이 감감하다.

물론 이런 현상이 노인 환자를 자주 만난 탓은 아니다. 그러나 병증이 심한 노인 환자를 경험하면서 순응됐기 때문인지, 그런 일로 스트레스 받는 일이 별로 없다. 전과 달리 주의력이 좀 떨어졌음에도 정상이니 비정상이니 굳이 따지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혹여 치매 같은 병으로 가지 않겠나 하고 한두 번 의심이 일기도 했지만, 부지중에 이런 생각마저 곧 잊어버리고 만다. 낙천적인 내 성격 탓도 있겠으나, 사실 이런 무(無)건강염려증은 병동 생활에서 얻은 이미 ‘늙어버린’ 내 마음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병동에서 겪는 경험들이란 대체로 이러하다. 치매와 우울증에 걸린 한 할머니. 젊어서는 활발하고 조급했던 성격이었고, 십여 년 전 남편과 사별했다. 장기간의 애도 반응에 따른 우울증을 방치한 탓에 초기 치매가 악화된 경우다. 회진 때마다 내 손을 붙들며 퇴원시켜달라고 안달을 한다. 하나 매번 그때뿐, 그 후로는 다른 환자들과 화평하게 잘 지내신다.

조용하고 말수 적은 다른 할머니. 6층 병실에서 지내시는데, 7층에서 프로그램 활동하다 다시 돌아갈 때쯤, “제가 몇 층이에요?” 묻는다. 거의 매일 “6층”이라 대답해주건만, 그때마다 너무 고마워하는 모습이다. 아하, 저 어르신 지난날 건강했을 적에도 저렇게 상냥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니고 있었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병에 걸리기 전엔 잔뜩 돈 욕심이 많았고 자식들에 대한 간섭도 심했던 할아버지. 이 병 걸린 뒤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인다. 그 무감각이 뇌의 병 때문이겠지만, 어찌됐든 얼굴 표정은 무덤덤, 평온하다. 질병으로도 자신의 카르마(업)를 소멸시키는 게 가능하지 않겠나라는 생각도 든다. 반쯤 치매에 걸린 다른 할머니는 어찌된 일인지 가무 활동 시간만 되면 멋진 옛 춤 솜씨가 그대로다. 신기하게도 자식들은 어머니의 이런 재능을 전혀 알지 못했다. 노인이 돼서도, 자신만의 자유와 해방 공간은 따로 있어야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처음 붓글씨를 배우며 어느 날은 자신이 쓴 것을 아주 대견스러워한다. 이를 딸에게 꼭 선물로 줄 거라 다짐하며, 혹시 분실될까 염려한다. 늙어서도 창조의 기쁨은 여전한 것이고 함께 나눠야 더 뿌듯한가 보다.

　그간 모셔왔던 예수상(像)도, 부처상도 대부분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져 간다. 또 ‘무엇이 되기’를 이제는 모두 그만두었다. 힘없고 나약해 보여도 그냥 ‘존재’하며, 말 없는 가운데도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한결 같다. 치매 환자들도 가끔은 명료하고 순수한 눈빛을 보인다. 해맑게 웃으며 표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바보 같은 존재감’들이 어김없이 내겐 ‘귀엽게’만 보인다. 그 따뜻한 슬픔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