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구는 왜소하지만 아주 건강해 뵈는 할머님을 진찰했다. 82세인 이 분은 최근에 치매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한 친구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어 스스로 찾아오신 것이다.

고졸 학력인 할머님은 젊은 시절부터 수년 전까지 일본어 관광안내를 하던 분이었다. 지금도 일본어 구사가 우리말만큼 유창하다고 하셨다. 할머님의 치매위험도를 측정하기 위해 뇌 MRI, 신경심리검사, 호르몬과 비타민 농도를 포함한 혈액 검사를 시행했는데 모든 검사 결과가 60대 초반 건강인과 다름이 없었다. 물론 치매위험도는 매우 낮았다.

오늘은 치매관리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치매를 극복하기 위한 범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정부에서 지정한 `치매 극복의 날`이다. 아직까지 완치 방법이 알려지지 않은 치매는 병이 시작되어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적어도 20년 이상 잠복기를 거치는 만성 퇴행성 질환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중년기 이후 뇌 건강 유지에 힘써 발생 시기를 늦추거나 진행 속도를 완화시키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다. 이를 위해서는 금연, 표준체중 유지, 유산소 운동 그리고 끊임 없는 뇌 자극 훈련이 필요하다.

두뇌 활성화 방법에는 독서, 글쓰기, 그림그리기, 카드게임, 바둑, 장기와 같이 기억력, 집중력, 판단력이 종합적으로 필요한 모든 정신 활동이 포함된다. 그중에서도 인지 기능 감퇴와 치매의 발생을 예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두뇌 강화 훈련법은 외국어 습득이다. 2013년 말 신경학 학술지(Neurology)에 영국과 인도 연구자들의 2개 언어 구사 능력과 치매 발생 위험도에 대한 공동연구 결과가 게재되었는데 1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 비해 2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치매 발생 연령이 평균 4.5년 지연되었다.

나이가 5세 많아질 때마다 치매발병률이 2배씩 증가하는 것을 고려하면 외국어 구사능력 한 가지만으로도 치매 발생을 거의 절반 정도 낮출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좀더 구체적인 증거로 지난 3월 미국과학한림원회보(PNAS)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제2 외국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 비해 인지 기능이 향상되어 있는 것은 물론 뇌의 구조까지도 변했다. 이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청소년기에 외국어를 습득하여 이를 평생 유지하면 노년기에 이르러 퇴행할 수밖에 없는 뇌를 건강한 상태로 유지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 소개했던 할머님처럼 멋진 노년을 보내고 덤으로 치매도 예방할 수 있는 외국어 배우기에 도전해 보시지 않겠는가.

[한설희 건국대학교병원 병원장]

기사원문 - http://news.mk.co.kr/column/view.php?year=2015&no=907737,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