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시한폭탄… 사고 부르는 ‘운전면허 적성검사’ 

[천지일보=임태경·손성환 기자] #. 지난달 20일 오후 9시께 광주 북구의 한 김밥집에서 할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안모(80세)씨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조사 결과 안씨는 자신의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급성치매가 발병한 것으로 드러났다.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고령운전자에 대한 운전면허 관리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급속한 고령화로 65세 이상 고령운전자 교통사고도 5년 새 무려 70%나 급증했다. 최근 10년간 교통사고 사망자는 감소했으나 고령자 교통사고 사망률은 오히려 해마다 10%씩 증가했다.

특히 치매나 정신질환, 신체 이상 등에 대한 점검 장치가 없고 적성검사가 형식적으로 진행된다는 데 그 심각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최근 부산 해운대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낸 가해 차량 운전자도 뇌전증 환자였지만 지병을 숨기고 운전면허 적성검사를 통과했다.

이에 현행 운전면허 적성검사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1종 보통 운전면허 갱신에 나선 직장인 유영수(43, 가명)씨의 운전면허 갱신 과정을 동행 취재했다. 

▲ ① 지난달 21일 유씨는 운전면허 갱신을 위한 적성검사를 받기 위해 서울의 한 면허시험장을 찾아, 적성검사표를 작성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치매 여부 자가체크… 날림 적성검사 

지난달 21일 오전 서울 서부운전면허시험장엔 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한 민원인으로 북적였다. 이날 유씨도 면허증 갱신을 위해 면허시험장을 찾았다. 

유씨는 먼저 적성검사표를 작성했다. 적성검사표에는 치매, 정신분열, 뇌전증, 신체장애 등 운전하는데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을 스스로 표기하게 돼 있었다. 

문제는 안전운전과 직결되는 부분이기에 전문의의 소견이 필요한 사항인데도, 적성검사를 받는 운전자가 스스로 이를 작성한다는 점이다. 만약 치매나 정신분열 등 문제가 되는 사실을 숨기고 작성을 해도 이를 걸러낼 장치는 없었다. 

검사지를 작성한 유씨는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검사실로 이동했다. 신체검사실 앞에는 30여명의 사람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대기자가 많아 오래 걸릴 것 같았지만 5분여 만에 줄이 없어졌다.

검사실에 들어선 유씨는 시력 검사를 받았고 바로 운전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확인 도장을 받았다. 유씨가 운전이 가능한지 판단한 신체검사는 10초 남짓의 시력검사뿐이었다. 30여명의 줄이 금방 없어진 이유다. 

신체검사 후 유씨는 면허증 교부 신청을 했고 5분 만에 새 면허증을 받았다. 이날 유씨가 적성검사표 작성부터 새 면허증을 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15분 남짓. 그나마 신체검사실에서 기다린 시간 5분을 제외하면 10분도 걸리지 않은 셈이다. 

운전면허 적성검사는 단지 면허갱신을 위해 하는 형식에 불과할 뿐 운전할 수 있는 신체 능력에 대한 정밀 검사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치매나 정신질환 등 운전에 위협이 될 만한 이상이 있어도 이를 숨기고 운전대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신체검사를 진행한 담당자는 “적성검사표에 문제가 있다고 표시한 사람만 따로 색구분이나 청력 검사 등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현행 운전면허 적성검사는 응시자가 병력을 스스로 밝히지 않는 이상 면허취득을 제한할 방법이 없는 상태다. 

이날 또 다른 운전면허 갱신자 김모(42)씨는 “사람이 많은데 적성검사나 운전면허 갱신이 빨리 진행돼서 놀랐다”며 “시간을 아껴서 좋기는 하지만 형식적으로 진행하는 것 같아서 적성검사의 필요성이 있나 싶기도 하다”고 말했다. 

▲ ② 치매나 정신질환 여부 등 운전면허 갱신에 결격사유가 될 중대한 사항도 피검사자가 스스로 체크하도록 돼 있었다. ③ 신체검사는 시력검사가 전부여서 10초 만에 다 끝났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치매 노인 등 고령자 운전사고 ‘늘어’ 

운전면허 적성검사는 면허 발급일 기준으로 일정 기간 내에 받아야 하는 정기적성검사와 질병에 의해 ‘수시로’ 받아야 하는 수시적성검사로 나뉜다. 

치매 노인이나 정신질환자 등은 질환 판정을 받고 6개월 이상 입원한 병력이 있는 경우에만 수시적성검사 대상으로 삼을 뿐 그 밖의 환자에 대한 운전을 제한하는 별도의 조치는 없다. 스스로 밝히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치매노인 수는 2010년 47만 4000명에서 2014년 61만 2000명, 2015년 64만 8000명으로 늘었으며 2020년에는 84만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고령운전자 수도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운전면허 소지자의 인원은 20~49세는 큰 변화가 없지만 50~59세는 연평균 6.68% 증가했다. 60~64세, 65세 이상도 각각 8.8%와 13.6% 늘었다. 

이에 따라 고령운전자의 교통사고 발생도 해마다 늘고 있는 추세다. 지난 2004년부터 2015년까지 55~59세는 1만 2707건→2만 8426건(123.7%) 증가했다. 60~64세는 7774건→1만 8704건(140.6%), 65~69세 3536건→1만 1527건(226.0%), 70~74세는 346건→3367건(873.1%) 등 고령일수록 사고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더욱이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 중 고령운전자 사고 사망자 비율은 2011년 11.6%(605명)에서 2012년 13.3%(718명), 2015년엔 17.6%(815명)로 꾸준히 높아졌다.

전문가들은 고령자들이 신체적 노화로 시력·청력·근력 등이 저하돼 사고를 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김인석 삼성교통문화연구소 연구원은 “고령자들은 신체적·정신적 퇴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된다”며 “적성검사 시 기본적인 시력·청력 검사와 함께 운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보처리능력, 운동수행능력 검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고령운전자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행정시스템이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경찰청 운전면허계 고윤용 반장은 “치매나 뇌전증은 운전면허를 받는 데 결격사유에 해당되지만, 개인정보 보호와 인권침해 우려가 있어 병원에서 경찰청 등에 통보를 못 해주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질병 환자에 대한 정보를 주지 못하도록 한 사례가 있었다”며 “이와 관련해 구체적인 연구 자료도 없는 게 현실이다. 치매 환자나 정신질환자 등에게 운전면허증을 발급하지 않는 구체적인 방안이 나와야 한다”고 덧붙였다. 

선진국은 고령운전자 교통사고 방지를 위해 인지능력 검사 실시, 고령 운전자 표시를 차량에 부착, 고령운전자 운전면허 자진 반납 등 다양한 제도를 시행한다.

노인 인구가 많은 일본은 고령운전자에 대한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고 있다. 연령에 따라 치매 여부를 확인하고, 75세 이상 운전자에 대해 운전면허 갱신 시 인지기능 검사를 의무화했다. 70세 이상 노인들에게 아예 운전면허를 자진 반납하도록 하는 제도도 운용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운전면허 갱신 시 의사 소견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있고, 2년마다 도로 주행 시험을 한다.

반면 국내는 소극적인 관리만 이뤄지고 있다. 현행 도로교통법 시행령 제45조에 따르면 나이와 상관없이 제1종 운전면허 보유자는 두 눈을 동시에 뜨고 잰 시력이 0.8 이상, 붉은색·녹색·노란색을 구분하고, 55데시벨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된다. 

이처럼 허술한 운전면허 관리 체계로 고령운전자 교통사고를 부추겼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김 연구원은 “선진국은 연령 특성에 맞춰서 검사 평가항목을 달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65세 이상이라는 좀 더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어 연령 증가에 따른 노화의 특성을 제대로 선별할 기회가 부족하다”며 “기능적인 퇴화를 평가할 수 있는 인지기능 검사를 적성검사에서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고령운전자 교통사고 발생 추이, 고령운전자 사고 사망자 추이 (자료: 삼성교통문화연구소, 경찰청) ⓒ천지일보(뉴스천지)